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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값·밥값에 연봉 20% 써… 지점장 무덤 충무로서 '영업의 달인'됐다"

작성자 : 김영성  /  등록일 : 2013.03.11 (17:38)  /  조회 : 2,736
지난달 25일 서울 충무로 인쇄 골목에서 만난 민병덕 국민은행장은 오래 떠났던 고향 마을을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이야, 아직 있네요. 저기 자주 갔었죠." 순대와 머리 고기를 파는 식당, 허름한 노래방 간판을 보고 반가워했다.

"이 근처 충무로역지점 지점장을 하면서 여기 사장님들하고 거래를 트려고 술을 참 많이도 마셨습니다. 예금해 달라고, 대출 써 달라고요." 충무로역지점은 2000년대 초 인쇄 골목이 쇠락하면서 실적을 올리기 어려워져 '지점장의 무덤'으로 불렸던 곳이다. "전임 지점장 3명이 줄줄이 직위해제를 당한 곳이라 죽기 살기로 뛰었습니다." 그는 이 지점의 실적을 전국 지점 가운데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렸다. 이곳에서 '영업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여기서 성공했기 때문에 은행장까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민 행장은 2010년 7월부터 총자산 268조원, 직원 1만6408명의 국내 최대은행을 이끌고 있다. 취임 첫해인 2010년 1500억원에 그쳤던 순이익을 이듬해 2조500억원으로 바꾸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그는 골목길 중간 중간 아직도 그를 알아보는 인쇄소 사장님들과 악수를 하면서 마치 선거유세를 하듯 골목을 돌다 한 식당에 앉아 소주와 안주를 시켰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 중학생 때 동네 불량배들에게 맞은 상처가 악화돼 죽은 큰형, 여장부였던 어머니 이야기로 시작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지점장 시절 얘기를 2시간 넘게 풀어놓았다.

삼국지 1년에 3번 읽는 영업의 달인, "영업은 신뢰다"

―충무로 지점에는 언제 근무했나.

"2002년부터 3년 반 정도를 이 골목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인쇄소 사장님들이 큰 고객이던 시절이죠. 충무로역지점이 실적이 안 좋았습니다. 전임 지점장 3명이 줄줄이 직위해제가 됐던 자리라 죽기 살기로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지점장 연봉이 8000만원 정도였는데 딱 작심을 했습니다. 연봉의 20%를 잘라서 개인적인 영업비로 쓰겠다. 밥값, 술값, 골프 값으로 쓴다. 그렇게 마음먹고 집사람한테도 얘기했습니다. 지점장 잘리면 어차피 연봉 20% 넘게 깎일 텐데 실적 올려서 승진하는 게 낫다 그랬죠. 그러다 보니 재테크를 할 만한 종잣돈을 모으지 못했어요. 아마 제가 가장 가난한 은행장일 겁니다. 아직 주택담보대출이 2억원 정도 남아서 갚고 있어요."

―영업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

"고객들이 잘될 때나 못될 때나 한결같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위기에 몰렸을 때 외면하면 그 인연은 영원히 끝나는 겁니다. 따뜻한 전화라도 한 통화하고, 밥이라도 한 끼 하면서 지내야죠.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어떤 은행을 찾겠습니까."

―은행원은 결국 세일즈맨이라는 말인가.

"그렇죠. 세일즈죠. 은행은 영업이 안 되면 문 닫는 겁니다. 세일즈가 안 되면 아무리 본부에서 기획을 잘한다고 해도 모래 위에 쌓은 성이나 다름없어요. 현장에 모든 답이 있는 거죠. 스마트폰으로 은행 거래를 하는 스마트금융의 시대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기본적인 거래를 스마트폰으로 해결하게 되면 고객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생기는 겁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차별화된 고객 서비스에 쓰느냐에 따라 은행 간에 승부가 날 겁니다."

―중소기업 등 고객을 찾아 현장을 자주 방문한다고 들었다.

"나는 역마살이 끼었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고객을 만날 수만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마다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86차례 출장을 가서 346명의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나중엔 임원들이 '결재 받을 시간이 없으니 그만 다니시라'고 불평을 해서 좀 줄였습니다."

―어떤 직원이 훌륭한 직원이라고 생각하나.

"당장의 모습보다 가능성과 열정, 그리고 됨됨이를 봅니다.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봅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은 다른 어떤 조건을 갖추더라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국민은행은 팀워크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기갑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그때 팀워크와 리더십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탱크는 4명의 전차병이 힘을 합쳐서 움직이면 천하무적이지만, 서 있으면 쇳덩어리에 불과해요. 탱크는 팀워크가 깨지면 쓸모없는 고철이나 다름없어요. 은행장이 된 뒤 강조하고 있는 팀워크는 바로 이걸 말하는 겁니다."

―요즘 무슨 책을 읽었나.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요즘 나오는 책들은 별로 읽은 것이 없어요. 또 제게 책은 삼국지 한 권만 있어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매년 삼국지를 3번 읽습니다. 제갈공명을 가장 좋아합니다. 상대의 심리를 꿰뚫고 대응 방안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은행을 경영하는 것도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투와 같다고 생각하는 거죠."

가족은 나의 힘이다

―민병덕 행장에게서 은행을 빼면 뭐가 남는가.

"별로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솔직히 가정보다 은행이 먼저였죠. 물론 가족들 먹이고, 입히려고 그랬다고 하지만, 집사람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부인은 그런 가장을 어떻게 생각했나.

"초등학교 1년 후배인 집사람은 애들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돈도 많이 못 버는 남편인데도 한 번도 바가지를 긁은 적이 없어요. 은행장이 됐을 때 전화를 했더니 아무 말이 없어요.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는데 집사람이 우느라고…. 집사람은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은행 차장 시절에 영업한다고 돈을 많이 써서 생활비도 거의 못 주고 하니까 1996년부터 3년간 서울 은평구 역촌시장 근처에서 5평짜리 냉면분식점을 했어요. 은행장이 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컸지만, 집사람이 제일 고마운 사람입니다."

―아직 주택담보대출도 다 갚지 못했다고 했는데.

"3년 전 부행장 시절에 4억원을 빌렸는데 이제 2억원이 남았습니다. 7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청약통장을 물려주고 가신 것인데 그게 당첨이 돼 이사하면서 빌린 겁니다. 변동금리로 4.2% 정도 이자를 냅니다. 월급에서 거래처 사람들 밥값, 술값, 명절 선물 값 빼고 나면 겨우 생활비가 남아 돈을 모으지 못했어요. 그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돈을 모으는 것보다 더 큰 재산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렵게 자랐다고 들었다.

"아버님이 농사를 지으셨는데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10년 위의 형이 중학교 3학년 때 불량배들한테 폭행을 당해 숨졌어요. 가난해서 병원도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그랬습니다. 형이 그렇게 숨진 뒤에 아버님은 나를 '붙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지 않도록 붙잡겠다는 뜻이라고 했죠. 6남매 중에 3남 1녀가 죽고, 1남 1녀만 남았습니다. 어머님은 여장부였어요. 한 번 결심한 것은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지금도 누가 내게 종교를 물으면 '어머니교' 신자라고 합니다."

민 행장의 군 시절 사진. /국민은행 제공
민병덕은 누구인가

민병덕 행장은 1954년 충남 천안에서 나서 대전 보문고와 동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국민은행에 입행해 경기 송탄지점장, 서울 충무로역지점장·영동지점장, 경서지역본부장 등을 거쳤다. 2008년 개인영업그룹 부행장으로 승진했고, 2010년 7월 행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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